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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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컨츄리 보이의 한국 여행(1)

By고현수 베이비조선 영국통신원Posted2017.08.07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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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경유를 거쳐 이른 아침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많이 지쳤을 텐데도 입국장을 들어서는 아이의 얼굴은 기쁨으로 가득하다. 영국서 태어나고 자란 도헌이에게도 한국은 가족들이 살고 있는 곳, 자연적으로 당길 수밖에 없는 음식이 있는 바로 그 나라다. 도헌이는 몇 주 전부터 한국에 간다고 영국 친구들에게 자랑하면서 손꼽아 기다려왔다. 할아버지 할머니 말에 매년 부쩍 자라서 들어온다는 도헌이와 ‘집’이 그리웠던 나, 우리는 이번 여름에 무엇을 공유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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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채로운 선택을 지지하는 한국의 현재
짐을 풀자마자 도헌이는 “엄마, 우리 마트에 가자”고 수줍게 말했다. “지금?” 시차는 커녕 비행 피로도 가시지 않았지만 아이는 이 말을 하려고 벌써 몇 주를 기다렸을 것이었다. 
작년에 경험한 저녁 마트에서 세계의 모든 물건들이 망라된 듯한 장난감 코너며 식료품관을 본 영국 시골 아이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엄마 영국에서 팔던 것들도 여기 다 있어.” 늘 별 다를 것이 없는 외식과 쇼핑문화에 익숙했던 도헌이는 인도 커리부터 피자까지 원하는 게 달라도 함께 앉아 먹을 수 있는 푸드코트가 너무 좋은 모양이다. 다채로운 경험이 가능해지자, 저절로 아이의 ‘선택권’도 보장됐고, 선택하는 즐거움을 맛보게 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영국은 선택의 폭이 정말 좁은 나라다. 처음 영국에 갔을 때는 ‘안 되는 건 절대 안 되는’ 영국 문화가 당황스러웠다. 별로 불평도 하지 않는 영국 사람들은 더 답답했다. 그 후 십년, 영국은 불편한 줄도 모르고 머물러 있는 동안, 한국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서 편리한 쪽으로 계속 변화해 온 듯 했다. 영국 수영장에서 수영모가 없으면 입장이 안된다는 말에 “네, 그렇군요.” 하고 순순히 돌아왔던 기억을 떠올리니 빈손으로 사촌들과 간 한강 수영장에서도 거대한 물놀이 인형부터 도시락까지 손쉽게 구입하고 빌려보니 왠지 탄산수처럼 속이 다 시원했다.
이렇게 다양한 선택을 누리는 데에 단점도 있을까? 사라진 ‘아쉬움’이 아쉽다는 생각이 문득 들기는 했다. 거의 유일한 어린이 채널인 영국의 씨비비스에서 좋아하지 않는 프로그램을 하는 차례라도 묵묵히 보면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한국 마트에서 장난감을 하나 고르고도, 엄청나게 많은 장난감이 더 있다는 사실에 뒤돌아보며 조바심을 내는 도헌이를 보면서, ‘안 되는 게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기회도 필요하다고도 생각도 들었다. 안 되는 걸 되게 하려는 노력에서 창의력이 나오기도 하겠지만 창의력만이 아이가 배워야 할 미덕은 아닐 테니까. 안 되는 건 안타깝고 슬픈 게 아니라는 것, 때에 따라 참는 것도 괜찮다는 것도 아이에게 주는 좋은 선물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어학을 배울 때의 필수품은? 
한국에서의 여름을 앞두고 우리 집에서도 한국어 교육에 박차를 가해보고 싶었다. 토요일엔 나란히 앉아 한글 책도 공부하고, 영어로 말하는 도헌이의 말을 한국어로 계속 고쳐주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가 단어를 읽긴 하더라도 어디에 쓰는지 감을 못 잡고, 무엇보다 오히려 한국어에 대한 어려움만 심어줄까 걱정도 됐다. ‘쌍둥이’를 계속해서 ‘산동이’로 발음하는 도헌이를 안타까워하는 우리 부부를 보고 선배 한국 엄마들은 웃으며 “괜찮아요. 이번 여름에 한국에서 많이 배워 올 텐데요.”라고 했다. 정말 한 달간의 ‘어학연수’가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막상 한국에서 언어를 배우는 과정을 지켜보니 흥미로웠다. 처음에 아이는 귀 기울여 듣기만 하고 입을 열지는 않았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가르쳐 주는 단어를 뜻도 모르고 따라하기 시작한 건 놀이를 통해서였다. 몇 번 할머니와 끝말이름대기를 해보더니, “엄마 끝말잇기하자. 내가 시작할게. 유리-리본-본보기” 라고 뜻도 모르는 단어들을 외우기도 했다. ‘빵’ 이라고 대더니 그다음 말을 ‘빠-앙 이니까 앙으로 시작해야해’ 하고 우기기도 헀다. 집 안에서 부메랑 던지기를 하며 “딱딱 못 맞춰?” 하는 할머니 말을 듣고 까르륵 까르륵 웃더니, 주차할 때 차가 조금 비뚤어지자 “딱딱 못 맞춰요?’하고 응용하기도 했다. 그 뉘앙스는 한글 완성책에서도 배울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한 수 배운 것은 사촌들로 부터였다. 무조건 맞춰줄 준비가 된 어른들과 달리 “무슨 말 하는 건지 모르겠어” 라고 콕 집어 말하는 사촌들과 어울리고 싶었던 것이다. 사촌형과 ‘보리 쌀’을 놀기 위해, 네 살짜리 사촌여동생의 관심을 끌기 위해, 아이는 단어를 꺼내 쓰고 반복했다. “우리 영국 돌아가서도 사촌들에게 편지 쓸까?” 한글교재의 단어를 반복해 쓸 때의 고통보다도, 관계 유지를 하고 싶은 욕심이 더 컸나 보다. “토요일마다 써서 보낼거야.” 야심찬 결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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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살, 흘러넘치는 즐거움으로 배우는 시기
커다란 백점 사인을 그려주고, 오버액션을 하며 칭찬을 했던 건, 나도 모르게 아이가 당근을 목표로 공부하도록 길들이고 있는 것이었을까? 칭찬 받으려고가 아니라 어울려 지내기 위해, 즐겁기 때문에 터득하는 과정은 이렇게나 자연스러웠는데 말이다. 다섯 살짜리 에게 강력한 동기부여는, 먼 훗날을 위한 즐거움의 유보보다는 함께 배우며 즐거워할 수 있는 ‘바로 지금’이었는지도 모른다. 안정된 관계라는 바탕위에서 배움이 잘 이루어지는 것은 유능한 선생님이나 유명한 학원보다도 ‘케미’가 잘 맞는 상황에서 더 효과가 좋은 것을 뒷받침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단 언어뿐일까? 어쩌면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살아가며 서로에게 배운다는 게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해서, 뭔가 특별한 자극이나 놀이나 문화를 찾으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까운 사람들과의 교감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아이가 기쁨 속에서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겠다. 우리는 경쟁하려고 배우는 게 아니라, 같이 재미있게 살기 위해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같이 살며 서로에게 배우는 것, 그것이 지금 도헌이와 나 모두에게 한국의 여름이 귀중한 가장 큰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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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수 베이비조선 영국통신원 (hyunsookoh@gmail.com)
글을 쓴 고현수는 성곡 미술관과 오페라 갤러리에서 전시기획 및 큐레이터로 일했으며 결혼 후 영국으로 이주해 런던 유씨엘 대학에서 박물관, 미술관 교육학을 공부했다. 현재 가장 큰 관심사는 ‘아이와 함께 가는 박물관, 아이와 함께 즐길 수 있는 박물관’이다. 주말이면 색연필 통 하나 열어놓고 하루 종일 미술관에서 노는 많은 영국아이들처럼, 내 아이가 박물관과 평생 좋은 친구가 되기를 바라며 함께 박물관 나들이를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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